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히스토리] 중동의 갈등의 기원, 사우디 VS 이란 1편
    히스토리 2020. 3. 18. 17:27
    반응형

    우리나라의 대부분 원유는 수입이 70% 이상이 중동 호르무즈 해협을 지낸다.

     

    사실 중동이라고 한다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곳, 가끔 뉴스에 나와 테러가 자행되는 곳, 20019.11테러가 자행된 나라 쯤으로 치부되기 쉬운 곳이다.

     

    호르무즈 해협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인데 인류최조문명 중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이 자리잡은 곳이고, 수메르 함무라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등 다양하고 유명한 나라들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종교적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발생지이다.

     

     

    그러한 이곳은 항상 시끄러운 지역으로 2020년 시작과 동시에 찾아온 사건이 발생한다. 이란 군부의 최고실세였던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이 그것이다.

     

    가셈 솔레이마니 2020년 1월 3일 미국 드론 폭격으로 사살되었다.

     

    중동은 왜 그리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역일까?

     

    현재 4개의 취약국가와 3건의 전쟁이 있으며, 주요 국가들은 많은 수의 군대를 갈수록 더 투입하고 테러단체들은 국경너머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더 정확히 시리아, 이라크내의 친 이란 민병대, 레바논 헤즈볼라, 예맨 후티, 가자지구 하마스 등은 중동 내 이란 proxy군이고 이들은 미국의 동맹국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UAE를 표적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가지고 있고, 반대편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항상 중동내의 모든 시위, 내전, 반란 중에 항상 두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항상 연관된다. 두 국가의 불화가 중동갈등 이해의 핵심이다.

     

    이 두나라는 중동의 패권을 두고 싸운다. 그러나 우습게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대신, 이 두 국가는 간접적으로 상대방에게 적대시 되는 나라를 지지하거나 갈등을 선동함으로써 서로 경쟁을 하였고 우위를 가지려고 노력이 있다. 이러한 전쟁형태를 대리전(proxy war)이라고 한다.

     

     

    특히 가난한 국가들 내부에서 강대국이 힘겨루기를 하면 국가의 기능을 상실해버린다.

     

    사우디와 이란의 경쟁으로 세력다툼이 벌어졌고, 중동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사우디-이란 경쟁은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같은 상태이다.

     

    각 진영은 독재자, 반란군을 지지하였고 서로 다른 편에 속한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와 같이 두나라는 지금까지도 계속 충돌하고 있는데, 우리는 중동의 상황을 잘 알기 위해서 그 기원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00년대 초, 아랍 반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통치 하에서 여러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었다. 그러면서 각 그룹들은 패권을 위해 다투는 상태가 되었다. 패권다툼을 하던 그룹 중 하나인 알사드는 페르시아반도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1932년 알사드는 국제사회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오스만제국과 이란

    6년후인 1938년 경, 사우디 아라비아 내에서 거대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었고, 석유는 전세계의 에너지자원으로 중요한 시기기에 곧 사우디 왕조는 부유해졌다.

     

    부유해진 사우디아라비아는 사막 전반에 걸쳐 도로를 닦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막강 국가중 하나였던 미국과 함께 동맹을 구축하하였다(서로 윈윈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석유가 필요했고, 사우디 알사드는 자신들의 왕권을 서포터가 필요했다).

     

     

    한편, 걸프만에서는 또 다른 나라 이란이 부상하였으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사우드 왕족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란은 또한 거대한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었고 그리고 훨씬 더 많은 무슬림 인구가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외세의 개입은 혼란을 야기하였다.

     

     

    18세기 부터, 이란은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두 차례의 침략을 받았다.

     

    1953, 미국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많은 지지를 받던 무하마드 모사드를 축출하였다.

     

    이란에서 미국은 레자 샤 왕조를 지지하였고 그는 이란을 적극적으로 세속화, 서구화시켰다. 아마 과거 이란의 모습을 보면 현재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이란과 지금의 이란을 비교해봐라

    그러나 문제는 그는 부패하였고 그의 비밀경찰(Savak)로 대중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1970년대, 사우디와 이란은 오일 기반의 경제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사우디와 이란의 왕족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매우 달랐다. 궁극적으로 이란 왕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통제권을 갖고 있지 못했고 사우디 왕족은 당위성과 애정은 이란과 사뭇 달랐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10년 뒤, 이란 국민은 결국 들고 일어났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군사력을 갖고 있는 강력한 정권을 전복하였다.

     

    1979년에 루홀라 호메이니와 이슬람 혁명은이란 왕조를 타도하였고, 이것이 이란과 사우디의 긴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루홀라 호메이니는 무슬림의 선생이었으며, 서구 세속적인 지지를 받은 왕조에 반대하는 가르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대중적이고 이슬람의 사상과 성직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정부를 지지하였다.

     

    루홀라 호메이니 중동현대 역사에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1979년 자신이 주장한 것을 위해 혁명을 이끌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는 긴장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자신들도 혁명으로 인해 사우디 내부가 시끄러워질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즉 사우디 정부는 루홀라 호메이니가 자국민을 자신들의 정권에 대항해 봉기하는데 단초를 제공할 가능성에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종교적 위협 또한 존재하였다. 여태가지, 사우디 아라비아는 무슬림의 패권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었고, 거기에 따른 명분 또한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그의 대중적 혁명이 이란을 무슬림 성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은 이슬람 수니파이고 반면에 이란의 호메이니와 추종자는 시아파이기 때문이다.

     

    ==>2편 계속 

    https://geopolitics.tistory.com/19

     

    [히스토리] 중동의 갈등의 기원, 사우디 VS 이란 2편

    1편 https://geopolitics.tistory.com/18 중동의 갈등의 기원, 사우디 VS 이란 1편 우리나라의 대부분 원유는 수입이 70% 이상이 중동 호르무즈 해협을 지낸다. 사실 중동이라고 한다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곳,..

    geopolitics.tistory.com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